몇년 전이었나요? <세계가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 이라는 짧은 글이 널리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아.. 내가 아주 행복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었지요. 대한민국 일반 시민이 누릴 수 있는 물질적 풍요가 전 세계를 기준으로 하면 대단히 혜택받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 뭐 그런 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글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정확히는 그 글 자체보다는 읽고 난 사람들의 반응 - '난 복받은 사람이구나 앞으로 감사하며 살자' - 이 싫었고, 사람들을 그런 빤한 방향으로 끌고가는 글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요. 오히려 '아니 내가 지금 그렇게 혜택받은 삶을 살고 있다면 진짜 부자들은 세계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아예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 아냐?' 하고 삐딱한 결론으로 흘러간 거에요. 그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능력과 노력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렇게 비정상적인 비율로 부를 축적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죠. 그리고 내 그런 생각에 힘을 더해주는 책을 만났습니다. 예전부터 이런 책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읽어보았네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하 <왜...>) 는 추천사를 빼고 160 페이지 남짓한 짧은 책입니다. 형식도 지은이와 지은이의 어린 아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쓰여 있어서 읽기 편합니다. 어려운 말도 거의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왜...> 가 담고 있는 내용은 절대로 '읽기 편한' 내용이 아닙니다. 아빠와 아들의 대화 형식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다 읽지도 못하고 책을 덮어 버릴 만큼 무겁고 불편합니다.
<왜...> 의 지은이는 대학 교수이자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입니다. 이론과 실제 체험을 겸비한 드문 사람이지요. 그는 아프리카를 뒤덮고 있는 끔찍한 기아와 중남미의 빈민가의 근원은 선진국과 다국적기업의 탐욕이라는 주장을 설득력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지금 생산력으로도 지구의 모든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데,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걸 이론적으로 정당화시키려고까지 한다는 거에요.
그뿐 아니란다. 지구는 현재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도 먹여 살릴 수 있어. 오늘날 세계 인구는 60억 정도 되지. 하지만 1984년 FAO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계산하여 지구는 120억의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거였어. (37 페이지)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은 엉터리 신화, 즉 기근이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작용을 한다고 믿고 있단다. (39페이지)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맬서스의 신화를 신봉하고 있어. 끔찍한 사태를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사이비 이론을 말야. (43페이지)
이 책의 절정은 지은이가 기억하는 한 아프리카의 젊은 장교에 대한 회상입니다. 기아와 부정부패에 허덕이는 소국 부르키나파소에서 4명의 젊은 장교들을 주축으로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개혁파의 리더이자 대통령인 토마스 상카라는 인두세를 폐지하고 개간 가능한 토지를 국유화시키는 등의 개혁 정책을 펴 4년 만에 부르키나파소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일구어내지만 자국 군부에 의해 37세의 젊은 나이에 살해됩니다. 그 배후에는 그의 개혁을 불편하게 여긴 프랑스 등 외국의 입김이 있었습니다.
상카라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의 커다란 희망도 깨졌지. 콤파오레 치하의 부르키나파소는 다시 보통의 아프리카로 돌아가고 말았어. 만연한 부패, 외국에 대한 극단적인 의존, 북부 지방의 만성적인 기아, 신식민주의적 수탈과 멸시, 방만한 국가 재정, 그리고 절망하는 농민들...... (151페이지)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까지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고 당혹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이렇게 믿기지 않는 일들로 가득하쟎아요. 그게 현실이고 누구라도 외면하고 싶어하는 불편한 진실이겠지요. 이 책의 주장이 모두 맞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알지도 못해요. 단지 <왜...> 의 주장대로 실현된다고 할때에 지은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무것도 없다는 단순한 근거로 그 진실성을 믿을 뿐입니다.
덧. <세계가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 을 검색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제가 그 때 읽었던 것은 전체 내용의 일부에 불과했더군요.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혜택받은 삶을 살고 있으니 감사하세요' 라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어요. 그 글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었거든요:
진정으로 나, 그리고 우리가
이 마을을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다면
정말로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갈라 놓는 비열한 힘으로부터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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