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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수만개의 서재를 결혼시키기 위해.


안녕하세요? 새로 북스타일의 필진 이름을 갖게 된 angryinch입니다.

방문수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성격이라고 애써 자위하며 거의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만 블로그질을 하다가 기회가 닿아 훨씬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는 북스타일의 필자가 되어, 앞으로 어쩌면 좋을지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실은, ‘쉽게 쓴다’는 이유로 간택되었습니다.ㅎ 어렵게 쓰고싶은데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책을 멋지게 추천할만큼 넓이와 깊이가 있지도 않으며 필력도 허접스럽지만, 얕은 독서생활에서나마 꼭 공유하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얘기해보겠습니다.

첫 인사를 겸하는 포스팅으로 거의 고민없이 떠오른 책이 있어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북스타일에서 만나는 우리가 이 공간을 우리들의 수많은 서재를 결혼시켜가는 과정으로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5년쯤 전에 처음 읽었을때 하도 재밌고 부러워 거의 눈물을 글썽였던,
책에 대한 책.

스스로 독서광이며, 대대로 독서광인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자랐으며, 독서광인 조지 콜트와 결혼해 독서광 기질을 보이는 두 꼬마를 두고 있는 작가 앤 패디먼의, 책에 관한 엣세이 열여덟편을 모은 책이다.
책에 얽힌 패디먼 가족과 친구들의 위트 가득한 이야기들에서 느끼는 충분하고 넘치는 재미, 책과 글에 얽힌 유명 작가들의 다양한 에피소드에서 알게되는 지식과 감동을 포함해서 지배적인 감상은 딱 두가지, 부럽고 고맙다는 것인데, 똑같은 사람들끼리 어쩜 그리 잘 만났을까 하는 부러움과, 거의 병증으로 취급될때도 있는 애서가들의 특성을 총대 매고 쏟아내주는것의 후련함과 고마움이다.


패디먼과 조지는 결혼생활 5년만에 서로의 책을 결합시키기로 했다. 5년을 살고 아이까지 낳은 후에야 부부는 ‘장서 합병’이 더 깊은 수준의 친밀감을 느끼는 과정이며 그것을 실행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았다.
침대나 미래를 공유하는것은 장난에 불과할 정도로 거대한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서야 진정으로 결합한 것이었다.

각자 소유한 많은 책들을 합치면서 책장에 자리잡는 순서, 겹치는 50권의 책의 처리에 합의하는것에 일주일이 걸렸다. 나의 선반 다섯개짜리 책장 하나를 정리할 때도 책을 어떤 순서로 꽂아야 할지 책을 쥔 손을 어쩔줄을 몰랐는데, 일주일이 걸린 그들의 작업은 얼마나 복잡하며 또 얼마나 행복했을지 그저 부러웠다.

패디먼은 영국문학은 연대순으로, 미국문학은 저자 이름순으로, 한 작가 내에서도 연대순으로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비해,
1. 읽은책은 아래로 일단 질러둔 책은 위에 2. 두번 이상 읽을 만한 책을 위에 3. 손님 방문시 있어보이는 까풀을 위에 4. 읽어냈음을 뿌듯해해 마땅한 두꺼운 책을 잘 보이는곳에 따위의 온갖 기준이 제멋대로 적용돼있는 내 책장이 귀엽고도 초라하다. 또 그렇게 해놔도 원하는 책을 금세 찾을 수 있는 심플함을 빨리 벗어나고 싶게 자극한다.
벽을 타고 잔뜩 쌓아놨던 그것들을 새로 산 책장에 처음 꽂으면서 뿌듯했던 때와 스탠드 불빛에 고상하게 비추이던 책장 하나가 마치 셰익스피어의 서재처럼 거대해 보였던 순간이 부끄러울만큼, 여러겹의 슬라이딩 책장이 있는 서재가 필요할만한 장서목록을 갖는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플 정도로 부럽다.


이 책은, 부부의 장서합병 얘기 외에도 책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얘기하는데 하나하나가 정말 흥미롭다.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책의 겉모습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관해, 표절과 인용에 관해, 책의 표지에 적힌 서명과 헌사에 대해, 오탈자와 구문오류 등을 집어내는것에 집착하는 애서가들의 특성에 대해, 헌책의 가치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던져주지 않아도 한번쯤은 생각해봤을만한 이런 주제들에 독자 자신의 경우를 함께 생각하며 키득대는것이 이 책이 주는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면서 고마움이다.
이 하나하나의 주제들은, 언젠가 나도 패디먼의 이야기에 더해 어줍쟎은 썰을 풀어보고싶게 할 만큼,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것들이다.
나도 이런 저런 독후감에서 하드백을 압도하는 페이퍼백의 충분한 가치, 책장 여기저기에 그때그때의 감상을 낙서하는 것의 의미, 커피를 쏟은 자국이 남은 책에 생기는 특별한 애정 같은걸 짧게 건드린 적이 있는데 이런것들이 나만의 감정일리 없음을 확인해서 기쁜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하는게 많다는 것은 독자의 책 중독 수준을 말해주는 것일테다.
나는 분명 전방위적으로 섭렵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활자 중독의 수준도 아니고, 절대량에 있어서도 독서광이라 할만하지 않은데, 그래도.. 그런것 외에도 자신의 책 사랑이 어느정도인지에 대한 설명키 힘든 기준들이 존재한다는걸 느낀다. 패디먼이 전해주는 그녀의 책에 대한 얘기들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나도 크게 모자라는 수준이나마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대단한 그녀와 ‘같은 과’라고 스스로를 추켜세우고 잠시나마 우쭐할 수 있다.


책 전체에 가득한 수많은 인상적인 이야기와 구절들 가운데, 문맥 상관없이 잘라낼 수 있으며 전체를 읽고싶어지게 만들 수 있을만한 몇개를 발췌하면서 마무리.

친구가 몇 달 동안 실내 장식업자한테 집을 빌려주었는데, 집에 돌아와보니 모든 책이 색깔과 크기 기준으로 재정리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 직후 실내 장식업자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식탁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사고가 인과응보라고 입을 모았다.


쇼는 헌책방에서 “OO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지 버나드 쇼가”라는 헌사가 적힌 자신의 책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책을 사서 그 사람에게 다시 보내면서 헌사에 한 줄을 보탰다. “새삼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지 버나드 쇼가.”


(오탈자를 집어내는 강박증을 가진것에 대해)
슬프게도 우리의 병에는 12단계 치료 프로그램이 없으니, 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배울 수밖에 없다.(중략)

헤븐스 법률회사가 배의 저당금을 기록하면서 소수점을 잘못 찍을 때 그곳에 있었다면, 그 회사의 고객은 천백만 달러를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1962년 NASA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마리너 1호의 비행 프로그램에서 하이픈을 빠뜨렸을 때 옆에 있었다면, 항로를 이탈한 그 우주탐사선을 부수어 납세자들에게 7백만 달러 이상의 손해를 끼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작년에 뉴저지 칼스타트의 문신가게에 있었다면, 노트르담 풋볼팀 팬인 22살의 댄 오코너의 오른팔에 Fighing Irish라고 문신을 새기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코너는 t자를 빼먹은 것을 가지고 문신 가게 주인에게 250,000달러짜리 소송을 걸었다. 나는 오코너가 이기기를 바란다. 평생 오자 문신을 몸에 달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나쁜 운명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재 결혼 시키기 - 10점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