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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무언의 합의의 두려움 - 왜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않는가

회사에서 팀 회의를 하다 보면 이럴 때가 자주 있습니다.
팀장:    ...다른 의견 있으면 말해 보세요.
팀원들:  ................. (서로 눈치만 본다)
팀장:   의견 없나요? 자유롭게 말해봐요.
팀원들: ............없습니다. (계속 눈치만 본다)

(회의가 끝나고)

팀원A: 이건 아닌데 말야...
팀원B: 난 사실 이렇게 생각했다고.
팀원C: 그래. 그것보단 이게 더 좋았는데.

회의 때에는 다들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다가 사석에서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입을 여는 거죠. 그러면 꼭 "왜 그때 말하지 않고 지금 그래?" 라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너같으면 말하겠냐?" 라고 받아쳐주면 대개는 우물거리면서 화제를 돌리려고 하지요. 그러다 언젠가 (술자리 같은 장소에서) 그때의 일을 회상하게 되면 때로는 팀장님 조차도 "사실 난 그때 그렇게 결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하더라고"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모두가 바라지 않았던 일로 흘러가 버린 걸까요? 



다행히도 어떤 경영학 교수님께서 그저 궁금해하는 걸로 끝나지 않고 연구를 시작해 책까지 쓰셨더군요. 바로 이 책입니다. 

왜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않는가?
제리 B. 하비 지음, 황상민 해제, 이수옥 옮김   2006-06-23
실제로는 전혀 다른 목적지로 가고 싶어하면서도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암묵적 합의를 통해 '에빌린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는 현상을 '에빌린 패러독스'라고 규정하고, 에빌린 패러독스의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처 방법을 소개한다.

하비 교수는 어느 날 처가집에 갔다가 겪은 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더운 날씨에 식구들이 축 늘어져 있자 장인어른이 기분전환겸 외식을 하자고 말을 꺼냅니다. 에어컨도 없는 차를 타고 나갔다 오자는 생각에 어이가 없었지만 장인, 장모님과 아내가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여서 찬성하고 말죠. 그리고는 당연히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축 쳐져 돌아옵니다. 집에서 언쟁이 벌어지죠. 마침내 식구들은 사실은 아무도 밖에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은이는 그 때 식사를 하러 간 곳의 지명을 따서 이러한 현상을 에빌린 패러독스 Abilene Paradox 라고 이름붙이고, 이러한 모순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생각을 서로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서 이른바 '무언의 합의' 에 빠지게 되면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의 장점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어느 조직에서든 일어나며 계속 악순환을 일으키고 그 원인과 경과는 이렇게 된다는 것까지는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만 그 다음 단계, 즉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행동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부터는 그다지 와닿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비 교수는 에빌린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의 하나로 직원의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종신 고용을 보장한 일본 기업을 그 예로 들기까지 합니다. 지나친 개인 경쟁을 유발하는 미국 기업 문화로 인해 조직원이 진실을 숨기고 무언의 합의 속에 들어가 소외를 피하려고 한다나요. 잘 나가다가 문전 헛발질을 하는 축구선수를 보는 기분입니다.

사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이 1988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미국 경제가 흔들리고 미국 기업은 일본 기업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각론에서는 좀 김이 새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비 교수가 지적한 문제와 진단 자체는 지금도 우리들이 뼈저리게 느끼는 일들이 아니겠어요.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조직 내에서 개인이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입을 다무는 길을 택하고, 그 결과 조직은 무언의 합의에 빠져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의 문제로 탈바꿈하게 되는군요. 마치 개인 위에 군림하는 별개의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조직' 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교류하고 힘을 합치는 '팀' 이 되어야 에블린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